언제부터인가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줄거리, 전문 영화평론가들의 평가, 감독의 성향과 제작 의도, 관객들의 평을 알고 가는 것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자칫 나의 시선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 보게 되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미숙하지만 '나만의 시선 갖기!'. 요즈음 나의 영화감상 태도이다.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에서 상영하는 7월의 영화가 풍성하다. 자그마치 7편. 최신작으로 생각거리를 듬뿍 안은 인디영화들을 무료로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 덕분에 그동안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기회를 얻어왔다. 4층 두루두루 강당은 제법 큰 스크린과 성능 좋은 스피커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다만, 계단식 강당이 아니다보니 앞자리 사람의 머리에 화면이 가려지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맨 앞자리를 고집하기 위해 일찌감치 도착하는 편이다. 오늘은 성인용 애니메이션 '반도에 살어리랏다'를 상영하는 날.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과의 대화시간도 있다니 더욱 기대가 크다.


   
▲서부캠퍼스 7월의 영화(좌, 직접촬영), ‘반도에 살어리랏다’ 포스터(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외국 영화 '라라랜드'를 패러디한 포스터는 보랏빛 도는 색감으로 몽환적이다. 멀리 남산을 배경으로 서울의 야경이 빛나고, 환하게 켜진 가로등과 함께 춤을 추는 주인공은 동화의 나라로 데려다 줄 듯하다.

 

그러나 웬걸? 치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반전이다. 하긴, 포스터에 수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주인공의 볼록한 배와 몇 가닥 없는 대머리, 내리 깐 눈에 미어터지도록 나온 볼까지. '레알 서바이벌 코미디'라 영화 제목 앞에 적혀있는 수식어 그대로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마흔 여섯인 주인공 오준구는 한때 연기를 했지만, 지금은 그를 불러주는 곳이 없다. 언제나 배우를 꿈꾸면서 밥벌이를 위해 대학에서 연기지도 시간강사 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친구에게 본인의 캐릭터와 잘 맞는 드라마 출연 제안을 받는다. 대본을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나오는 걸 보니, 친구 말대로 대단한 작품인가 싶다. 거의 같은 시간, 우연히 같은 과의 권위있는 노교수가 여제자를 성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노교수는 이를 무마하려고 오준구에게 정교수 자리를 제안한다. 번번이 떨어진 정교수의 기회가 왔지만, 정교수가 된다면 동시에 연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밥벌이와 꿈 사이에서 주인공은 갈등한다. 연기에 대한 꿈이 한없이 크지만, 결국 가족을 위해 현실적으로 정교수 자리를 선택한다. 그러나 치매증상을 보이는 노교수의 오락가락하는 정신상태 때문에 꿈까지 버리며 택한 정교수가 되는 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한데….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오준구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는 주인공 오준구를 중심으로 '헬조선'이라 불리게 만든 한국 사회의 여러 비리들을 잘 버무려 놓았다. 미투운동으로 비로소 세상 밖으로 드러난 학내 성폭력·성희롱 문제, 교수 임용을 둘러싼 비리, 비싼 의대 학비 때문에 의사의 꿈을 지레 접는 딸, 좋은 학군에 자식을 보내고 싶은 엄마의 극성. 85분의 짧은 이 블랙코미디 영화로 감독은 많은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연줄보다는 실력이 우선인 상식적인 사회가 되는 일은 멀기만 한 일일까?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갑'들의 후안무치한 형태를 없애려면? 아이들의 꿈도 부모의 꿈도 모두 펼치며 사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예술가들이 밥벌이에 큰 걱정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사회는 없는 걸까? 불편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들이다.

 

굳이 예술가만 아니라 우리 모두 현실을 위해 어느 정도 비루해지고, 애절한 꿈은 자연스레 뒤로 미뤄왔다. 영화의 곳곳에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의 문제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더욱 몰입하게 된다. 감독은 주인공에게 마음 주기 바빠 오준구의 아내를 많이 놓친 듯 했다. 오준구를 이해 못하는 나쁜 아내처럼 보이지만 배우의 꿈을 갖고 있는 시간강사 남편과 사느라 그녀도 고단하다. 두 아이의 엄마로, 맞벌이를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에게 라면 봉지를 던져대는 억척 여성으로 그려진 모습이지만 이 땅의 엄마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무게도 녹녹치 않을게다. 나도 '직장 맘'으로 오래 살았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오준구네 가족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가 끝나고 이용선 감독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나이가 좀 지긋할 거라는 나의 상상을 비켜나 아주 젊다. 의외다. 한없이 순수해 보이고 잘 웃는 감독은 관객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해줬다.

 

"제목의 '반도'는 한반도 같은데 맞아요?"

 

한반도를 비하하는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라 한다. '헬조선' 같은. 대답을 들으니 씁쓸하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감독은 성추행하는 노교수의 캐릭터를 그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 직접 그렸다는 뒷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사회자(우)와 이용선 감독(좌)

 

"영화 성적은 어때요?" 국내 반응은 그저 그랬고, 세계 유명 영화제에 초청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이다. 주인공 오준구의 꿈과 현실의 갈등은 감독 본인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하다며 솔직한 속내를 내보인다. 우리는 이런 영화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고 응원의 힘을 보냈다. 문득 오늘도 꿈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는 반도의 또 다른 오준구들에게 애정을 느끼며 안부를 전하고 싶다. 

 

"안녕들 하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