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고즈시마의 마을 한가운데 공터에 자리 잡고 있는 오타 줄리아 현창비.>

 

오타 줄리아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친숙한 성녀(聖女) 이름으로 기억된다. 훌륭한 성인이나 복자여서가 아니다. 일본의 절대 권력자 도쿠가와 에야스(德川家康) 수청 요구를 거부 죄로 절해고도에 유배되어 고통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일본 동쪽 외딴섬 고즈시마(神津島)에서 열리는 줄리아 () 한국인 신자들이 그녀를 기리 위해 몰려간다.

오타(大田) 일본식 이름이고, 줄리아는 세례명이다. 조선 여인이었지만 우리 이름을 길이 없어 400년이 넘도록 그렇게 불렸다니, 자체가 역사적 비극이다. 이름만 모르는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붙잡혀 갔는지, 때였는지,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알려진 없다.

역사적인 사실은 임진왜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 장수에게 붙잡혀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고, 도쿠가와 궁의 시녀 시절 금교령을 어긴 죄로 낙도에서 오랜 유배 생활을 했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이 로마 선교회 본부에 보낸 보고서한 같은 기록에 나오는 짧은 언급에 기초한 내용들이다.

일본이나 조선의 역사적 문서, 근년의 나라 문헌 어디에도 충실한 기록이 없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제 메디나 신부의 보고서한에 실린 단편 내용들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민화를 근거로 소설류가 줄리아 이야기의 원천이다. 이야기에 나오는 줄리아의 신분은 일반 서민의 , 양반 또는 귀족의 다양하다. 심지어 왕녀로 미화된 내용도 있다.

일본 작가 모리 레이코(森禮子) 소설삼채의 여인(三彩)’에는 줄리아가 경남 남강 강변에서 붙잡힌 양반의 막내딸로 표현되어 있다. ‘오타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경위에 대해서는 도공이었던 양아버지가얻어온 ’, ‘얻어왔다 말을 했는데, 왜병들이 이를 이름으로 잘못 알아들어오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붙잡힐 엄마의 시신 옆에 삼채의 장식이 있는 은장도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줄리아를 양반의 딸로 보는 근거로 삼고 있다. 소녀의 어머니가 왜병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은장도로 자결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자 쓰시마(對馬島) 영주 소요시토시(宗義智) 아내인 마리아에게 신병이 넘겨진 소녀는 나가사키의 수도원에서 모레혼(Morejon)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일본의 패권을 겨룬 세키가하라() 전투 서군에 가담했던 유키나가가 전사하자 그녀의 운명도 기운다. 동군의 전리품이 되어 슨푸성(駿府城· 시즈오카 )으로 물러난 도쿠가와 처소로 들어가게 것이다. 쇼군(將軍)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었지만 이에야스는 변함없는 절대 권력자였다.

줄리아가 그의 수청 들기를 거부한 일은 뮤노스 신부가 마닐라 교구장에게 보고한 서한에 간략히 나온다. 그는줄리아가 쇼군의 첩이라고 생각해 성체를 주지 않았다 밝히면서어느 그녀(줄리아), 만약 쇼군이 불러도 그의 요구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내용을 보고했다.

소설삼채의 여인에는 줄리아가 침소에 불려가 몸을 더럽힐 위기에 몰리자 은장도로 자결하려 했는데 행위가 이에야스를 위협했다고 몰린 것으로 묘사돼 있다. 뒤로도 차례 불려 갔으나 끝내 수청을 거부한 줄리아는 금교령 위반이란 죄목으로 낙도 유배 형을 받는다.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1613 1 12일자 보고서한에는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임진년 전쟁에서 붙잡혀온 불쌍한 외국인이지만 궁궐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조선 에서 태어난 제가 지상의 (이에야스) 기쁘게 하려고 쓰노가미 도노(津守殿·고니시 유키나가) 통해 일본에 와서 섬기게 하느님을 불편하게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줄리아는 계율을 수호하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끝내 왕명을 따르지 않아 1612 4 20 오시마(大島) 섬으로 쫓겨 갔습니다.”

귀양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아지로(網代) 항구로 줄리아는 처형장에 끌려간 예수가 그랬듯이, 맨발로 산길을 걸어 발이 피투성이였다고 서한에 적혀 있다. 오시마 섬에서의 귀양살이 만에이제라도 배교하면 돌아올 있다 연락을 받았다. 이를 거부하자 니시마(新島) 보내졌고, 다시 회유를 차버리자 절해고도 고즈시마로 이송되었다. 어부 가구가 사는 외딴섬이어서 정기 선편도 없는 낙도 중의 낙도였다.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그곳에서 줄리아는 움막을 짓고 함께 유배된 신자와 서로 의지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오타 줄리아 제 미사를 마친 한일 가톨릭 신자들이 오타 줄리아 묘에 헌화하고 있다.>

 

고즈시마에 것은 1991 5 22 줄리아 () 때였다.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 권유로 도쿄 항에 밤배를 타고 11시간을 갔다. 천주교 도쿄교구 창설 100주년 기념을 겸한 행사여서 한일 양국 신자들이 수백 모여 줄리아의 고혼을 위로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선착장에 배가 닿자 언덕 위에 설치된 커다란 십자가가 일행을 맞아주었다. 마을 한가운데 마련된 행사장은 온통 꽃과 깃발로 장식 되어 있었다. 유인묘지(流人墓地)라는 안내판 안쪽 묘소에서 나라 신자들이 줄지어 국화송이를 봉헌하고 합장 하며 기도를 올리는 의식은 경건했다.

줄리아 묘소는 어른 높이의 불교식 돌탑이었다. 위에 조선 기와 모양의 덮개돌을 얹고 탑신에 십자가 형상이 음각되어 있었다. 앞에 합장하고 원을 빌면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면서 주민들은 탑을호도사마(寶塔樣)’ 불린다고 설명했다.

옆에는 근래에 세운 고절 현창비가 있었는데, 비면에 한복 차림의 줄리 초상화가 놓이고 위아래에 치마 저고리를 입힌 형상이 눈길을 끌었다. 행사가 끝난 아침에 십자가를 찾아갔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십자가는 높이가 10m 보였다. 자리에 서니까 해배(解配) 간구하면서 기도하는 유형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틀 동안 줄리아 이야기만 듣고 뜻깊은 축제에 참석한 탓이었으리라.

촌장은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61 순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근년 발굴된 선교사 서한에는 줄리아가 거기서 풀려나 나가사키와 오사카에 선교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1622 2 15 프란시스코 파체코 신부가 예수회에 보낸 보고서에는꼬레안 오타 줄리아는 신앙 때문에 박해받았고, 지금은 오사카에 있습니다. 저는 그를 도와왔고, 지금도 힘껏 돕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가 해배된 것은 1619년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천주교의 요람인 나가사키에서 활동하다가 오사카로 옮겨 것이 1622년이었다. 거기서는 콘프 라디아(Confradia)라는 신자 모임에 참여, 가난한 여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천주교 400년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서울 절두산 성지의 줄리아 묘소가 없어졌다고 2010 종교 매체가 보도했다. “고즈시마 에서 순교한 사실이 없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든 묘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반론 때문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것은 서양 선교사나 제들의 여러 기록으로 증명된다. 속에는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고 고결하게 순교한 이름 모를 순교자들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소개돼 있다. 1869 출간된 레온 파제스의일본 기리시단 문사 나오는 조선 여인 이사벨라와 막센시아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나가사키에 살던 이사벨라는 기리시단(切支丹·크리스천의 일본식 표기)이란 이유로 남편과 함께 나가사키 부교(奉行·행정관)청에 끌려갔다. 고문이 시작되자 남편은 곧바로 투항했다. 다른 신자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달랐다. 상상할 없는 인내로 고문을 이겨냈다.

후미에(踏繪·성화를 밟게 하는 ) 거부하거나, 보기에도 끔찍한 기구를 사용하는 고문에 꺾이지 않는 신자들은 산으로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뜨거운 온천물을 퍼붓는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문을야마아가리(山上)’ 했다. 신자들은 고문을입산한다 말로 표현했다.

나가사키 가까운 시마바라(島原) 반도 에운젠(雲仙)이라는 유명한 화산 온천이 있다. 온천은 뜨겁기로 유명하다. 1629 나가사키 부교청은 6000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그 곳으로 끌고 갔다.

대부분은 온천 고문에 겁을 먹고 관문에서 신앙을 포기했다. 천주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방면이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요지부동. “남편이 개종했으니 여필종부(女必從夫) 도리 아니냐?”, “여기는 일본이니 일본 법과 관습을 따라야 한다.” 이런 종용에도 끝내 묵묵부답, 고개를 저었다.

화가 관헌들은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머리에 돌을 얹었다. “돌이 어지면 변심한 것으로 간주하겠으니 조심하라 일렀다. 말에 대한 이사벨라의 응답은 놀라웠다. “제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돌이 떨어진다고 제가 배교한 것은 아닙니다.” 말이 없어진 관헌들은 다른 방법을 써서 고문을 계속했지만 끝내 그녀의 신심을 꺾을 없었다.

 

<가톨릭 신자들을 고문하던 운젠 온천>

 

고문을 가할 여러 가지 이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당시 나가사키 시정에 떠돌았다. “펄펄 끓는 온천에 집어 넣으려고 그녀를 데리고 가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끓는 온천물이 사방으로 튀어 관헌들이 달아났다느니, “ 살배기 사내아이가 온천물에서 걸어 나왔다느니, “머리 위에 올린 돌이 전혀 무겁지 않다고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살배기의 출현이 하느님의 현신이었다고 떠들어댔다.

시마바라 번주(藩主) 아리마 나오즈미 (有馬直純)성의 시녀 막센시아의 신심도 유명했다. 지하 감방 돌기둥에 묶여 8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배고픔을 몰랐다 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어느 귀부인들이 찾아와 베풀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12일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감방에 누워 있었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정반대로 영주의 왕비가 되어 호강한 사람도 있다. 비록 측실이기는 했지만 성의 왕비가 되어 후손의 제사를 받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름은かくせい(가쿠세이)’, 각시라는 우리말에서 유래된 슬픈 이름이다. 한자로는廓淸’, ‘岳淸’, ‘加久世伊 표기되었다. 그것은 극히 예외적으로 이름을 말하거나 때의 일이고, 평소에는おむぎさま(보리님)’ 불렸다. ‘むぎ 보리[] 뜻한다. 그녀가 보리밭에서 붙잡혀 왔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재일 언론인 윤달세(尹達世) 기행문 ‘400년의 오랜 세월 따르면, 보리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철수할 히라도(平戶) 성주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에게 붙잡혀간 도공 무리의 일원이었다. 시게노부는 유키나가 휘하의 장수로,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그의 후손 마쓰우라 세이잔 (松浦靜山) 남긴 기록갑자야화(甲子夜話)’에는우리 아래 고라이마치(高麗町)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시게노부 할아버지가조선의 (임진왜 )’ 포로로 데려온 사람들이 살던 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히라도 시내 네시코(根獅子)라는 곳에 있는 보리님 묘소 안내판에도 약간의 자료가 적혀 있다.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 마쓰우라 공이 적지 조선에서 정찰 보리밭 그늘에 숨어 있던 처녀 사람을 발견했는데, 마음씨도 얼굴도 고운 미인이어서 개선할 데리고 돌아왔다.”

나가사키 역사산보라는 팸플릿을 인용한 김달수의일본 속의 조선문화에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키나가를 추종해 수도 한양을 점령한 시게노부가 어느 밖을 둘러보다가 보리밭 속에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의 몽진 행렬에서 낙오된 왕가 일족 같았다 했다. 붙잡아 데려와 보니 굉장한 미인이어서 진중에 두고 총애했다. 귀국할 임신 중이었던 여자는 안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엽색행각 비난이 두려웠던 시게노부는 아이를 이키(壹岐) 해안에 버리게 하고 여자만 데리고 돌아가 측실로 삼았다. 첫아이를 잊지 못한 그녀는 방으로 수배해 뱃사공이 키우고 있던 아이를 찾아 시게노부의 차남(松浦藏人)으로 입적시켰다. 덕에 그녀는 평생 호강할 있었다. 아들이 유산 3000석을 물려받아 당당한 호족 가문을 일으킨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강홍중(姜弘重)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조정에 올린 고서동사록()’ 나오는 이야기는 다르다. 1624 8월부터 8개월간 일본에 다녀온 그의 글에는 보리님이 창원 출신이라고 기록돼 있다. 나가사키 역사산책에는조선 14 소경왕(昭敬王·선조) 공주 곽청희(廓淸姬)라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나와 있다.

보리님이 선조의 딸이라는 사실은 국내 문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름을 곽청희라고 것은가쿠세이라는 통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글자 여자를 뜻하는 히메(ひめ) 가져다 붙인 같은데, “왕의 몽진 (蒙塵) 길에서 낙오된 같다 이야기가 부풀려진소설 봐야 것이다.

 

문창재 언론인(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bravo_l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