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년 전인 2017년 2월 중순, 전북 정읍의 내장산을 찾았습니다. 한겨울 진면목이 드러나는 겨우살이, 특히 붉은겨우살이를 만나고 싶어 일부러 길을 나섰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연자봉 중턱 전망대에 오르자 과연 기대했던 대로 폭의 멋진 수묵화가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각각 연한 미색과 붉은색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겨우살이와 붉은겨우살이가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환하게 드러나 있었던 거죠. 겨울 여행의 정취에 흠뻑 빠져 변산반도 서쪽으로 내처 달려 닿은 곳은 부안의 능가산 내소사. 벌써 10여 전부터 야생화가 피기 시작했다는 ‘꽃동무’의 전언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차로 두세 시간 내려올 만큼 남녘이니 분명 기온 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2월 초순에 꽃이 피었단 얘기가 믿기지 않았기에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내소사를 품은 능가산 자락을 겨우 10여 분쯤 올랐을까. 눈을 헤치고 피어난다고 해서 파설초(破雪草) 또는 설할초(雪割草)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노루귀가 티끌 하나 없는 선홍색 꽃을 활짝 피운 보았습니다. 아~ 봄이 이미 지척이 있는 것을, 능가산 산중에선 벌써 봄이 시작된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날 만난 노루귀는 봄의 전령사를 넘어, 그 자체가 화창한 봄날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부지런합니다. 풀과 나무들은 부지런합니다. 흰 눈이 덮인 산을 보며 언제 봄이 오나, 언제나 봄이 오나 하고 안달하는 사이, 이미 꽃은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아니라, 꽃이 피니 봄은 절로 따라오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봄꽃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부지런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 봄보다 먼저 피어, 겨울이 가고 새봄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리는 야생화가 바로 노루귀입니다. 원래 꽃이 둘둘 말려 나오는 삼각형 모양의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해서 노루귀란 국명(國名)을 얻었는데,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우리 몸속의 간()과 닮아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학명 속명으로 간을 뜻하는 헤파티카(Hepatica)를 얻었고, 영어 이름은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입니다.

전초(全草)라고 해봐야 키 10cm, 잎 5cm, 꽃 1.5cm 정도에 불과해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작은 풀꽃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색과 깜찍하고 앙증맞은 생김새는 ‘봄 야생화의 대표 주자’로 꼽을 만큼 환상적이고 매혹적입니다. 먼저 색은 흰색에서부터 홍색과 청보라색에 이르기까지 변이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홍색도 연분홍에서부터 진홍색까지 스펙트럼이 넓고, 청보라색 역시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색에서부터 코발트블루까지 다양합니다. 단순한 흰색도 있지만, 미색에 가까운 흰색도 있습니다. 꽃 못지않게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꽃줄기와 총포(꽃대 끝에서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 등에 무수한 잔털입니다. 볕 좋은 봄날 강렬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노루귀의 하얀 솜털을 번이라도 바라본 있다면 ‘노루귀’의 황홀한 매력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Where is it?

노루귀의 큰 장점의 하나는 어떤 야생화보다도 개체 수가 풍부하고, 또 개화 기간이 길다는 것이다.

자생지 또한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강원·경기 접경지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어 누구든 관심을 갖고 부지런히 산에 오르면 볼 수 있다. 이르면 1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4월에도 꽃이 필 만큼 개화 기간도 길다. 한두 송이가 피기도 하지만, 많게는 수십 송이가 한데 뭉쳐서 핀다. 산비탈 여기저기에 만개한 노루귀는 붉은색 루비나 파란색 사파이어가 박힌 듯 화려하다. 전국의 산이 자생지이지만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수도권의 경우 화야산과 구봉도, 구름산 등이 유명하다. 남쪽에서는 포항의 운제산과 경주의 토함산, 부안의 능가산 등도 이른 봄 꽃 보러 다니는 이들의 발길이 잦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bravo_l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