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완성을 향해 다시 시작

꿈에 대한 열망 하나로 89세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을 입학하는 우제봉(禹濟鳳·89) 씨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한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는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삶의 관록이 묻어난다. 1남 2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어머니로서의 삶을 완성한 그녀가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격동기를 지나온 여자의 삶과 그녀가 이루려 하는 꿈에 대해 들어봤다.

“배움에는 때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또박또박 말한다. 89세.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장수한 나이다. 우제봉 씨의 나이가 놀라운 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의가 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숙명여자대학교 원격대학원 실버비즈니스학과를 졸업하는 그녀는 우수논문상까지 정도로, 젊은 사람들과의 공부 대결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열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겸손하고 순종적인 여자

5년 씨는 남편을 먼저 보냈다. 그녀는 지금도 죄의식이 느껴진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떠난 같아 부끄럽다 말한다. 부끄러움이라고? 젊은 세대라면 상황에서 그런 죄의식을 느끼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대는 지금과는 다르다. 누구 하나 떠나보내면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자로 나누고 재단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섞이고 묶이던 예()의 시대가 거기에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에도 잉꼬부부니 애처가니 공처가니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로 사랑했죠. 남편은 존중해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어요.”

우제봉 씨의 기억은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의 집안은 소위 있는 집안이었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가문의 망신이라고 만류하며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 시청 문화과에 이력서를 냈고 취직이 됐다.

그녀가 시청에서 근무하다 상사의 심부름으로 다방을 들렀을 때의 일이다. 친구 누나가 운영하는 다방에는 미래에 그녀의 남편이 남자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남편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를 했다.

어느 퇴근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남편이 그녀를 막아서더란다. 그리고 자신과 교제하자고 했다. 요즘 같으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일이었다. 그 시절엔 여자에게 구애할 무데뽀로 밀어붙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시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까지 만날 다방에 죽치고 있었다. 우제봉 씨는 심부름을 때마다 그를 만났다. 솔직히 그렇게 다짜고짜 행동하는 남편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승낙하면 만나보겠다고 쪽지를 써서 그에게 전달했다. 설마 부모님까지 동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짜고짜 시작된 연애, 그리고 결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상식을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어느 퇴근하는데, 남편의 고모와 가족들이 우르르 와서 그녀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기질이 화끈한 집안이었다. 다음 날에는 아예 시아버지가 만나자며 찾아왔다.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주를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은 사주 부터 보고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러운 연애, 더구나 처음 하는 연애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렵지 않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인상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이순재를 닮았다는 남편은 이번에는 다짜고짜 그녀의 집까지 따라와서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의외로 남편의 그런 행동을 친정에서는 좋게 봤다. 패기 있고 자신 있는 모습이라는 평가였다. 이 또한 요즘 같으면 무단 침입으로 걸릴 일이었다. 과연 시절의 낭만이란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힘이었던 듯싶다.

“제가 살던 시집이 정릉 기와집이었어요. 지금은 성북 구립 유치원이 됐어요. 거기서 남편과 70년을 살았죠.”

남편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소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성실하고 강인한 여자

“결혼하니 주위에서 뭣도 모르고 결혼했네, 사흘도 살고 달아날 거라고들 얘기했죠.”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미지이지만 그녀의 심지는 굳고 두터웠다. 스스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힘든 몰랐다. 아니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견뎠던 같다.

집안일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낳은 늦둥이인 시동생도 키워야 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힘들 때마다 그녀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그녀를 많이 챙겨줬다. 사실 씨는 쌀도 씻을 몰랐다. 요리하는 법도 시집에 와서 배워야 했다. 여느 시부모라면 그런 모습에 혀를 차며 한심해했을지도 모른다. 시아버지도 그녀가 마냥 예뻤던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면 열두 시까지 방에 앉지 못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어도 웃으면서 시집살이를 있었다.

씨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인성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진 데서 나온 아닐까. 그녀는 자주 ‘내가 여기서 행동 잘못하면 타인에게 누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명문학교 출신에 덕망 있는 집안의 가풍이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강인한 태도야말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제야 자신만의 꿈을 이룰 있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방송통신대학교 생활과학과 대학원에 합격한 우제봉 씨는 지난 1월 13일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러 갔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꿈, 패션디자이너

“내가 공부하기엔 진짜 고령이지.(웃음) 입학할 때도 시선들이 만만치 않았어. 방송국에서도 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남편을 여의고 평창동 예능교회 봉사활동을 때만 가끔씩 밖에 나오던 씨를 부추긴 것은 자식들이었다. 자식들은 “엄마 좋아하는 일은 공부잖아”, “엄마가 하고 싶은 하는 가장 보기 좋다”며 어머니가 늦게라도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하고 싶은 공부였을까?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였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패션디자이너 꿈을 갖고 있었고 공부를 위해 미국에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가서 공부하는 것을 남편도 반대했고 시댁 식구들도 반대했다.

“그때 시댁에선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어요. 우리 딸들은 학원도 다니고 대학교를 갔죠.”

너무나도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자. 경력 단절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었다. 벽은 높았고 그녀는 오를 힘이 없었다. TV에서 앙드레 김을 때마다 ‘나도 있는데’ 하는 미련이 몰려오곤 했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은 필요

자신이 놓친 꿈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숙명여대에 전화를 했을 그날이 마침 신청 마감날이었다. 그것조차 어떤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졸업을 위해 논문까지 쓰는 단계로까지 흘러갔다.

“학기 중에 교통사고도 나고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논문을 있을까? 자신이 없어 시험을 봐야겠다 싶어서 김숙응 교수님에게 말했더니 ‘아깝게 시험을 보느냐, 논문을 써야지’ 해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그녀는 계속 자신을 재촉했고 교수에게도 재촉했다. 빨리 졸업한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후회들을 던져버리고 다시 출발선에 그녀에게 공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힘을 마땅히 써야 하는 당위성 같았다. 평창동 예능교회에 가서도 열심히 기도했다. 그녀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노리는 분야는 실버를 위한 패션 사업.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론이 필요했고 체계적인 공부를 것도 때문이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집에서 버리는 옷들을 리폼해 선물로 주던 사람이다. 이미 실전을 충분히 익히고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학문적 지식이었다. 그녀는 최근 이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으며 운좋게 합격을 했다.

 

<우제봉 씨의 지도교수인 실버비즈니스학과 대학원 김숙응 교수(왼쪽 두 번째)는 이렇게 말했다. “우제봉 원우님은 늦게 배우는 만큼 열정이 굉장해요. 어린 학생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죠. 원격으로 배우는 PC는 기본, 미술심리사 2급, 요양사회복지사, 실버 종이접기 강사, 치매예방 강사, 평생교육사 등 자격증도 여러 개 보유하고 있어요.”>

 

90대 패션디자이너의 꿈

패션디자이너가 되면 그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옷을 만들어서 팔아야죠. 돈을 벌어서 도와줘야 사람이 너무 많아요.”

돈을 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촉’을 믿고 패션디자인 길을 걸어갈 의지로 불타고 있다. 자신이 돈으로 남을 돕는 일의 즐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니어를 위한 패션이 필요해요. 젊은 사람들 것은 이미 많으니까요. 시니어가 젊은 사람 입으면 어울리거든요. 나는 그런 옷을 사면 고쳐서 입어요. 입으면 몸에 맞으니까요.”

젊은 취향의 옷만 있지 시니어 몸의 특색을 살린 옷은 없다는 그녀의 진단은 정확하다.

90대 패션디자이너. 듣기만 해도 경이롭다. 어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나이 사람들에게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게 아직 홍보가 됐어요. 그래서 내가 마음이 급할 수밖에요.(웃음) 그래도 늦으면 늦는 대로, 내 스타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입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이죠. 나이에 맞는 패션은 없잖아요.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시니어 옷이 아니라 몸매나 취향에 맞게 시니어가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야무진 꿈은 어떤 결실을 가져오게 될까?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현실로 만든 그녀이기에, 그 어떤 꿈보다도 젊게 빛나는 그녀의 꿈이 기대가 된다.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지미 프리랜서 studiojimilee@gmail.com   bravo_l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