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는데, 새벽에 나가도 괜찮을까요”

일본 쪽으로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는 초가을이었다. 우리 부부를 비롯한 네 부부는 몇 달 전에 일정을 간신히 맞춘 제주도 1박 2일 여행 중이었다. 매달 적금 붓듯이 돈을 모았지만 서로 바쁜 탓에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제주도를 찾은 길이었다.

자타 공인 달리기 마니아인 우리 부부는 일행들에게도 운동화를 꼭 챙겨오라고 말해둔 터였다. 물론 걷기에 편한 신발이면 되지만 가급적이면 조깅 정도는 같이 해보자고 권유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둘째 날이었다. 숙소로 잡은 비즈니스호텔 정문에서 새벽 6시에 만나 일출을 보러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날씨가 말썽이었다. 며칠 전부터 제주도에는 태풍의 영향이 우려된다는 일기예보가 나와 있었다. 전날 밤 내내 바람이 윙윙거렸고 일출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점점 더 명백해졌다. 이런 날씨에 그래도 바깥으로 나가볼 건가, 아니면 따뜻한 차 한잔으로 숙소에서 몸이나 녹일 건가. 네 부부 중 절반은 숙소에 남고 절반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밖으로 나간 우리 일행을 맞은 거리는 한산했다. 이미 휴가철도 지났거니와 이른 새벽시간이었다. 바람 소리는 요란했지만 생각만큼 바람은 세지 않았다. 태풍이 동쪽 먼 바다로 지나가면서 강원도 쪽은 폭우가 내렸지만 제주도는 영향권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숙소에서 5분 정도 거리인 제주도 중문 해수욕장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운 모래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마치 눈이 소복하게 내린 거리를 설렌 마음으로 밟듯이 모래사장을 밟아봤다. 나와 남편은 가벼운 조깅을 했고 다른 일행은 모래사장을 뒤따라 걸었다. 태풍의 영향이 남아 있기 때문인 듯 해변을 철썩대며 때리는 파도는 장관이었다. 평소에는 잔잔했을 제주도의 파도는 흰색 물보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중문 해수욕장은 여름철의 대목을 지난 쓸쓸함과 초가을의 낭만이 그대로 묻어났다. 우리 일행이 마치 해변을 전세 낸 기분이었다.

우리 일행은 중문 해수욕장을 조깅한 후에 고급 호텔들과 아직 분양 중인 바닷가 콘도, 원숭이와 앵무새들이 살고 있는 이벤트장 같은 곳을 둘러봤다. 천천히 달리고 천천히 걸었지만 다시 맛보지 못할 것 같은 낭만이 묻어났다. 바람이 분다고 새벽에 나서는 일을 포기했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1박 2일의 제주도 여행은 모두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벽에 중문 해수욕장 인근을 둘러본 기억만이 더욱 뚜렷이 남을 것이다.

 

우리 일행의 발자국만 가득한 제주도 중문 해수욕장

 

달리면서 보는 풍경은 차로 보는 것과 다르다

이봉주 선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여행 일정 중 꼭 한 번은 새벽에 달리기를 한다고 했다. 시내 관광을 할 때 머릿속으로 미리 코스를 짠다고 한다. “두 발로 뛰면서 보는 풍경은 차로 달리며 보는 것과 또 다르다”라고 그는 말했다.

달리기 관련 단행본을 출판했던 작가 김연수는 한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 만을 바라보면서 달린 적이 있다. 그때 이어폰에서 리 오스카의 ‘샌프란시스코 베이(Bay)’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나는 그 노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여행지에서의 달리기는 일상의 달리기와는 또 다른 멋이 있다. 휴가를 가거나 출장을 갈 때 가방 속에 반드시 챙겨 넣는 1순위는 바로 운동복과 운동화다. 휴가지나 출장지에서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달리는 느낌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작은 행복이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5년간의 달리기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경험을 호주 브리즈번 출장 때의 새벽 조깅으로 꼽을 정도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달렸지만 호주 브리즈번의 새벽 공기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속초 대포항 인근 숙소에서 일어나 아침에 일행들과 달리기를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달리기를 하는 모임에서 만난 부부들이었다. 이들은 누가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달리기 복장을 챙겨왔다.

첫날 숙소에서 회와 소주를 곁들여 가볍게 한잔 하고 잠든 다음날이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고성 8경 가운데 하나인 청간정을 찾았다. 청간정을 잠시 둘러보고 또 다른 고성 8경인 천학정까지 달리기를 하기로 전날 코스를 짰다.

 

속초 인근에서의 달리기

 

강원도, 이른 새벽 달리기의 낭만

청간정에서 출발해 평소보다는 다소 느리게 해변가를 따라 다 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천학정까지 가려면 아야진해수욕장과 아야진항을 지나야 한다. 해파랑길이라고 써 붙인 자전거길이 사라진 듯 하다가 또 다시 나타났다. 도로와 자전거길이 합쳐진 곳은 별도의 자전거길이 없기 때문인 듯했다. 간간이 자전거용 데크길이 따로 만들어져 운치 있는 느낌이다. 전날 강풍에 가까운 바람이 불어서 강릉 쪽에 대규모 산불이 났다고 했지만 달리기를 하는 곳은 너무나 조용했다.

이른 새벽인데다 아직 휴가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도로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돌풍이 간간이 불어와 먼지가 날리기도 했지만 강원도 해변길의 풍경은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바닷가 곳곳에 군부대에서 쳐놓은 철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청간정에서 천학정까지는 직선거리로 3km가 조금 넘는 것으로 표시돼 있지만 해변길을 따라 달려보니 4km가 좀 넘는 듯했다. 천학정이라는 팻말을 뒤로 보고 100m를 올라갔다. 그런데 정자가 안 보였다.

“하늘의 학들이 놀다간 바위를 천학정이라고 부르기로 했나 보다”라는 새로운(?) 해석을 붙이면서 내려오니 도로 반대편에 커다란 천학정 안내판이 붙어 있다. 다시 한 번 천학정을 찾아보기로 했다. 천학정은 커다란 바위 뒤쪽에 살짝 숨어있었다. 주위에는 100년 이상이 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어 옛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 곳 역시 일출로 유명한 장소라고 했다. 천학정을 잠깐 구경하고 청간정으로 다시 달려서 돌아왔다. 왕복 9km 정도 되는 듯 했다. 돌아오는 길에 전날 폭죽놀이를 했던 아야진 해변 인근의 편의점에서 일행들과 같이 커피를 마셨다. 반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직접 발로 달려봤던 아야진해변의 풍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행지에 달리기 복장이나 신발을 챙겨가 가보자. 숙소에서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서 볼 일이다. 달리기를 하기 어려우면 운동화를 신고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날 밤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여행지에서의 달리기나 걷기는 또 다른 낭만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