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묵 어르신의 낭만에 대하여”

  - 천리마택배 현장에서 만난 사람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트로트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배호의 노래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 왔나․……."
택배 어르신들이 일하는 짬짬이 쉬는 대기실에서였다. 누구인가 들여다 봤더니 양승묵 어르신이었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중이었다. 노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단하시네요. 배호 이상이십니다."
"대단하긴 뭐…… 소싯적에 좀 부르긴 했지만……."
어르신은 겸연쩍어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감을 내비쳤다.
알고보니 어르신은 이미 각종 노래자랑 대회에서 대여섯 번의 수상 경력에 방송 출연 경력도 있었다.
"이 양반 진짜 가수여. 몰랐어?" 옆에 있던 다른 어르신이 알려주었다.
"가수는 무슨…… 그냥 예전에 가수협회 회원증 하나 있었던 거지." 양승묵 어르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그거잖아요. 어르신이 가수이신 거 맞네요." 

 

   

 

어르신은 배호 팬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 배호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연예인 팬클럽의 원조 세대인 것이다. 나는 어르신이 연예인이라는 사실보다도 팬클럽의 회원이라는 사실에 묘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학창 시절 기자는 송창식과 윤형주의 트윈폴리오를 좋아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시나브로 ‘7080’이라는 집합명사 속으로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해나가는 한 편에 좋아하는 가수의 ‘판타지’를 품고 있다는 건 현실을 늘 아름답게 비춰보려는 낭만적인 의지의 소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어르신의 살아오신 내력이 듣고 싶어졌다. 내가 조르자 어르신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성진 노랫가락처럼 풀어내었다.


양승묵 어르신은 19세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엔 돈암동에 있는 주유소에 주유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69년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에는 주유소의 기름차를 직접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운전면허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운전은 희소성 있는 기능으로 새로운 직장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어르신은 같은 곳에서 일을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도 다시 같은 주유소로 돌아왔다. 어르신의 성실한 태도를 아껴주었던 주유소 사장의 간청이 있었던 것이다. 7년 이상을 무사고로 운전을 하자 개인택시 면허가 나왔다. 어르신은 지금도 그 면허와 첫 차의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 이후로 20년을 개인택시를 운전하다가 개인용달로 바꾸었다. 총 30년 가까이 무사고 운전을 하는 모범운전사로 경찰청, 장관, 시장 등 여러 기관장들로부터 받은 표창장만도 10여 개에 이른다. 

 

주유소 차를 몰던 시절에 인근의 회사에 다니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살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결혼 후 아파트를 장만하여 입주하였을 때라고 한다. 작은 아파트였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거주 공간을 부인과 함께 만들어냈다는 성취감만큼은 하늘에 닿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어르신은 그곳에서 1남1녀의 자식들을 낳고 키웠다. 지금은 모두 출가하여 또 다른 삶의 단위를 꾸려가고 있단다. 어르신은 몇 해 전 개인 사업을 스스로 접고 부인과 함께 지낸다. 부인은 살고 있는 주택 한 쪽에 작은 식당을 마련하여 소일을 하고 어르신은 지하철택배에 들어오게 되었다.

 

더 할 나위 없이 순탄해 보이는 어르신의 삶. 무척 다복해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순탄하기 만한 삶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더군다나 궁핍하던 60년 대에 무작정 상경한 젊은 청년이 홀로서기까지 ‘눈 감으면 코 베가는’ 각박한 도시에서 겪어야 했던 고난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하는 내내 어르신은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언급도 과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그때  살아온 내력을 경쾌한 어조로 풀어낼 뿐이었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추상화 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당나라 때  고명한 대주혜해(大珠慧海) 선사에게 한 율사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그렇네."
"어떻게 노력하십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네."
"그거야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다 도를 닦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네. 사람들은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않고 이것저것 요구가 많고, 잠잘 때 잠만 푹 자지 않고 온갖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밥 먹을 때 밥만 먹고 잠잘 때 잠만 자는’선사의 수련처럼 어르신 세대는 어렵고 힘든 시간을 오로지 ‘살아내는’ 것으로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만들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다 보지 않았고 다가오는 시간에 주눅들지 않았다. 덕분에 어르신의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풍요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세상은 여전히 새로운 문제로 뒤엉켜있지만 그 소란스러움은 다시  오늘의 세대가 ‘밥 먹고 잠자듯이 살아내야’ 할  삶의 숙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