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첫눈 올 때 다시 만나자던 약속이 무색하게 해마다 첫눈은 이걸 눈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늘 희끗희끗 떨어지다 말았는데 올해는 웬 걸요.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온통 하얘져 있었어요. 이렇게 속 시원한 첫눈이 제 생애에 또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을 만큼요. 첫눈이 내리고 나니 이제 정말 겨울이 왔구나 싶어요.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저절로 한 해를 돌아보았습니다. 정말이지 2018년은 저에게 있어 너무도 다양한 활동들이 펼쳐지는 한 해였던 것 같아요.

 

 

주부 은퇴를 하면서 이젠 좀 더 나만의 시간을 자유롭게 운영하며 ‘글 쓰는 여행가’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었지요. 그 다짐이 무색할 만큼 올해는 글 이외의 프로젝트에 가담하면서 정신없이 보내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했던 아티스트 웨이 연구회를 커뮤니티형 학습공동체로 정착시키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 와중에 글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자주 문의를 하셔서 오지랖통신 펜클럽도 만들었고요. 주부 경력을 주제로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결국은 엄마학교협동조합까지 설립을 했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교차하고 동행하는 동안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일감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물론 그 상황을 열심히 ‘뽐뿌질’을 해주는 50플러스 재단도 한 몫을 했지요.

 

남들에게는 정말 뭘 하고 다닌다고 간단히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일을 했어요. 근래에는 아예 작가라는 말 대신 ‘글 쓰는 작당가’라고 소갯말을 바꿔야 했을 정도예요. 이런 걸 누구에게 강제로 떠밀려 했으면 아마 반도 소화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나마 오래 앓고 계시던 시부모님이 동시에 소천하시고 막내 아이마저 집을 떠났기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그렇게 생긴 여유 시간에 참아왔던 사회적 창작력이 봇물 터지듯 발휘되었던 것 같아요. 그간 집에서 혼자만 뒤처지지 않도록 공부 삼아 여기저기 손길을 보태던 경험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소셜다이닝 이야기파티, 아빠의 식탁, 2050 소통여행, 전략적 관계성장 워크숍, 펜클럽 독립출판, 개인주의자의 도시캠프와 같은 기획 프로그램도 다 색다른 사람끼리 어울리는 재미가 있었지요. 엄마들의 은퇴를 준비하는 빈둥지 리노베이션 과정은 저에게도 특별한 의미였고요. 고등학생들의 진로탐색을 위해 교육기획을 하는 동안 현재의 아이들을 다시 바라보는 기회가 있었고요. 11월에는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직미(Magic Me)라는 비영리기관 운영진과 한국의 각 세대가 자기 연령대에서 느끼는 고민과 상황들을 동시통역으로 나누는 신기한 경험도 해봤어요. 늘 지나만 다니던 국회의사당 정문을 통과해 의원회관에서 여성의 나이듦을 주제로 하는 모임에 패널로도 참석했고요. 엄마학교협동조합 식구들과 함께 갔는데 늘 우리끼리만 주고받던 이야기들을 공식석상에서 발표하게 되니 감격해서 소름이 다 돋더래요.

 

그렇게 2018년이 화려하게 흘러갔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났고, 그들과 재미있는 일을 구상하고,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만들어내느라고요. 하지만 그러느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저와의 약속을 조용히 뒤로 미루고 있었습니다. 일명 ‘한 달에 하루, 일 년의 한 달’ 여행 프로젝트지요. 아티스트 웨이 프로그램에는 자기 성장을 위한 기본 도구가 두 가지 있어요. 첫째는 모닝 페이지고 둘째는 아티스트 데이트예요. 모닝페이지는 매일 아침 자기의 마음을 글로 쏟아내는 자기 대화 장치이고, 아티스트 데이트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즐거움을 누리는 자기 충전 활동이죠. 보통은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만이라도 하는 걸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서로 독려하기 위해 만날 때마다 그 경험들을 자랑하기도 하고요. 가끔씩 그걸 여행으로까지 확대해보라고 권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면서 점점 혼자 즐거울 수 있는 독립 시간을 늘려가게 하자는 마음이지요.

 

저는 글 쓰면서 여행 다니는 것이 로망이었기에 미리부터 결심을 했었어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달은 글 쓰면서 여행을 다니겠다고요. 어디로 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온전히 제 자신에게로 돌아와 지낼 수 있는 환경이면 되는 거죠. 그렇게 벌써 3년째입니다. 바쁜 와중에서도 늘 생각해요. 이번 달은 언제 갈까 스케줄을 뒤적이기도 하고, 올해는 어디에서 한 달 묵을까 상상도 하죠. 그 생각만 하면 지쳐 있다가도 생기가 돌고, 마구 설레거든요. 그렇게 즐기던 삶의 징검다리를 2018년에는 좀처럼 건널 수 없었어요. 한 달 하루를 지키려 애를 썼지만 사실 출장이나 워크숍으로 때우게 된 달이 더 많았어요. 바쁜 상황에 일부러 시간 쓰고 돈 쓰면서 떠난다는 게 정말이지 마음처럼 쉽질 않더라고요.

 

다행히 일 년에 한 달은 지난 3년 동안 얼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지요. 3년 전에는 엄마난중일기 최종 작업을 하느라, 필리핀 보홀에서 지냈고, 2년 전에는 딸과 함께 하는 여행기를 위해 스페인 포르투갈을 다녀왔어요. 작년에는 글과 인연이 닿은 분의 권유로 비엔나에서 지냈고요. 올해는 아직도 시간을 못 내었어요. 어느새 벌써 이렇게 첫눈이 내리고 있는데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겨울에 떠나기로요.

 

나이 들어가면서는 이렇게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젠 정말 오롯이 내 안에서 동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어느새 가라앉게 되지요. 마음 변할까봐 내처 항공편을 예약했습니다. 겨울에 따뜻해지는 뉴질랜드로 가볼 작정입니다. 뉴질랜드 남섬에서 이미 1년을 지낸 경험으로, 여행 작가 친구들과 공동저술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사이 무엇보다 제가 변했으니 다시 한 번 가도 좋을 것 같아요. 크라이스트처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아카로아’에도 들리고 싶어요. 종종 저의 상상 글쓰기 배경 장소가 되거든요. 이번에는 직접 가서 실행해보려고요. 한적해서 심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한없이 천천히 흐르는 그런 곳에서 말이에요.

 

 

머무는 동안 다음에 나올 책 원고를 어느 정도 완성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저 혼자 놀이를 만들고 또 혼자 지낼 만한 아티스트 데이트를 한 해 한 해 늘려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경험들이 모이면 다른 분들에게 권할 만한 여가 방법으로도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잘 다녀와서 다시 또 봄에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한 달에 하루 일 년에 한 달, 그렇게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