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잇는 길은 어디로 열려 있는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세대 갈등이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노년 세대가 위기의식을 느껴 아래 세대를 품으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저출산으로 인해 젊은 세대가 윗세대를 이해하는 폭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마을 공동체를 만들고,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경험을 나누어야 한다.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는 힘들었던 시기와 고도성장 시기의 중간에 있던 경험으로 세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김찬호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1. 세대 갈등의 새로운 양상 

서울시가 청년들을 위한 임대 주택을 건설하는 계획이 일부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인근의 아파트 가격 하락, 공사 과정에서의 안전과 불편 문제, 교통의 혼잡 등의 이유를 내세우고 있는데, 가장 자극적인 것은 그 일대가 ‘빈민 지역으로 슬럼화 되면서 우범지대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임대 아파트가 들어서면 주변의 임대료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 동네에서 월세를 받아 생계를 꾸리는 노인들이 거세게 반대에 나서고 있다. 

 

만성적인 실업 위기와 함께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해 정부에서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방안인데, 이에 제동을 걸고 있는 이들 역시 곤궁한 생활을 이어가는 노인들이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피해를 입는 소수자나 약자들이 서로 힘을 모으기는커녕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자주 반복되어왔다. 그런데 이렇듯 조부모 세대와 손자손녀 세대 사이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대 갈등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변화가 빨라지고 그것을 젊은 세대가 주도하면서 기성세대와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는 대중문화에 젊은이들이 중심을 이루면서, 문화적인 감수성에서 극명한 차이가 드러났다. 여러 세대가 함께 즐기거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많지 않은 것이 단적인 증거다. 그와 비슷하게 소비문화와 생활양식에서도 서로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다른 한편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길항 관계가 나타났는데, 70, 80년대에 반체제 청년운동이 벌어질 때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보수성에 늘 저항했다. 이른바 민주화 세대와 산업화 세대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나타나는 세대 갈등은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은 노년 세대가 일종의 피해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동안에는 문화적 감각이나 정치적인 지향에서 마찰이 일어난다 해도, 기성세대는 비록 고리타분하고 꼬장꼬장 할지언정 어른으로서의 체통을 지키려 했고 아래 세대를 품어주는 마음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아량은 급격하게 고갈되고, 자신들이 배척당하고 밀려난다는 위기의식이 지배하는 듯하다. 태극기 집회에서 촛불 광장에 대해 드러낸 적개심과 혐오 감정은 상당 부분 세대를 축으로 해서 공유되었다. 그리고 이번의 청년 임대 아파트 건립 반대에서도 극도의 배타주의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사회적 배경은 무엇인가.

 

 2. 연장자의 권위, 그 사회적 토대

한국은 나이를 엄격하게 따지는 사회다. 서양과는 비교할 것도 없고, 아시아권에서 온 외국인들도 그 점에서 적응이 힘들다고 한다. 그나마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나라가 우리처럼 존대 말을 쓰는 일본인데, 거기에서도 한국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구라고 하면 (이성 친구를 제외하면) 거의 동갑내기로만 한정되는데, 일본에서 ‘토모다찌(ともだち)’는 서너 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도 통용된다. 그리고 젊은이가 어른에게 말을 할 때도 약간 반말 투로 들리는 어미를 종종 붙인다. 유교가 생활문화로까지 스며들지 않은 탓인지, 연령에 따른 상하관계를 우리보다는 훨씬 덜 의식하는 편이다.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서열 의식은 연장자를 깍듯하게 예우하는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노인 공경은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중요한 미덕이다. 나이가 들어서 육신이 쇠약해지고 생산에 기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품위를 잃지 않고 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단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권위를 인정하는 듯하지만, 세월과 함께 쌓인 지혜와 경륜을 인정하고 그 효용을 사회가 흡수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경험의 축적이 공동의 자산이 되었던 전근대사회, 특히 농경사회에서 연장자 우대는 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산업사회에 접어들어서 그런 ‘기능’이 점점 작동하지 않게 되었지만, 문화는 그 나름의 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상황이 바뀌어도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기 마련이다. 어른을 정중하게 모시는 문화는 지금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로지 관성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주효한 힘을 발휘했다.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혼란기에 의지할 곳은 피붙이밖에 없었고,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도 가족의 헌신 내지 희생을 통해 생존을 도모했고 삶의 수준을 높여갔다. 오로지 자식 하나 잘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부모들 덕분에 한국의 교육 수준은 높아졌고,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겠다는 집념이 근면함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까지 이어진 고도 성장기에는 그러한 ‘투자’가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경제의 규모가 빠르게 팽창하고, 거기에 인구 증가가 맞물려 상승 이동의 기회가 많아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자녀들이 학력과 경제력에서 부모보다 나아지는 세상에서 효심은 당연한 덕목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로 여겨지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단지 자기 부모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윗세대 전체에 대한 공경으로 확장되었다. 

 

3. 세대 간 유기적 연결의 균열 

IMF 금융위기를 거쳐 2000년대 이후 저성장기로 접어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그 동안 당연시되어온 이런 전제들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경제의 전체적인 파이가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승자독식의 불균형 구조가 심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이런 사정은 당분간 크게 변할 것 같지 않고, 극심한 저출산으로 인해 경제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가운데 젊은 세대의 세계관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류대학에 들어간다고 해서 윤택한 삶이 보장되지 않고, 근면 성실함이 보장해주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을 감지한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흙수저로 여기며 금수저와의 비교 속에서 박탈감을 느낀다.

기성세대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식 농사짓느라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는 나빠졌고 수명은 길어졌다. 그나마 기댈 것이 인간관계인데, 그 마저도 점점 희박해져간다. 지역사회가 해체되어 이웃이 사라지고, 일인가구가 급증하여 가족끼리의 상부상조도 어려워진다. 저마다 생계를 꾸려가느라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심신의 여유도 경제적 여력도 없으니, 연약한 처지에 있는 이웃과 가족을 보살펴주기 어렵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관념도 사라지고 있어서 더더욱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기 쉽다. 청년 임대주택에 대한 반응에서 드러나듯,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노인들은 이해관계에 점점 민감해진다.

 

다른 한편,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고생스러운 역사와 현실에 무심하다. 예전처럼 그 분들의 땀과 수고 위에서 오늘 자신의 웰빙이 존립한다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도성장의 열매를 윗세대가 독점했고, 그 주요한 수단이었던 부동산이 자신의 경제적 자립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기성세대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린 것이 아닌데도, 도매금으로 묶여 경원시된다. 특히 완전히 노년으로 접어든 이들은 쉽사리 괄시의 대상이 된다. 꼰대로 무시당하고 ‘틀딱’으로 비하되고, 진보의 반동으로 비난받는다. 전쟁과 가난을 헤치며 험난한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오면서 오늘의 삶과 사회의 기반을 마련했건만, 그 모든 역사가 부정당하는 듯하다. 그런 억울함의 집단 감정이 태극기 집회의 한 가지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고도 분석된다.

 

지금 한국사회가 겪는 세대 간의 갈등은 단지 문화적인 감수성이나 세계관의 차원이 아니다.  그런 단절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존재의 유기적인 연결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이 깔려 있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자신의 뿌리라고 여기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자기 생명의 연장선에서 바라본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種)과 달리 기억을 간직하고 역사를 중시하는 것은 세대를 넘어선 공동체 의식이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대의 단절은 바로 그런 유기적 연대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것 아닐까 싶다. 저출산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다음 세대를 양육하면서 윗세대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인데, 그런 통로가 원천 봉쇄되기 때문이다.

 

4. 공공의 마당을 열어야 
세대를 넘어선 만남과 소통의 길은 열릴 수 있을까. 마음을 열고 서로를 수용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마주 앉아 얼굴을 맞대고 말문을 열 수 있는 상황 자체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선입견 내지 고정관념이 작용하고, 혐오나 경멸의 감정이 지배하며, 회피나 무시의 태도가 관성처럼 작동하는 가운데,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경험하기 힘든 것이다. 

 

서로를 ‘의미 있는 타자’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삶의 맥락을 재구성해야 한다. 지난 반세기 이상 우리는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하면서 사적인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있었다. 절대 빈곤이 만연했던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에는 그런 삶의 태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당 부분 기능했다. 그러나 공공의 차원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점점 많아지는 지금,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진보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세대 갈등의 심화는 그 한 가지 증세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새로운 접점이 마련되려면, 광장이 드넓게 열려야 한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동의 과제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함께 풀어나가는 영역이 확보되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공공 영역이 빈약한 편이지만, 촛불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새로운 페이지를 썼다. 그런 광장이 일상 세계에서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미투 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권력이나 관행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을 함께 창조하는 운동도 병행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세대 간의 다각적인 연계가 맺어질 수 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중년 이후의 삶이 풍요로워지려면, 후배들의 성장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을 가리켜 ‘생성성(generativity)’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아래 세대를 위한 창조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젊은이들을 보살핌으로써 나를 돌보는 것, 후대에 봉사하는 동시에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상생의 길이 거기에 있다. 결국 노년에 가장 절실한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인데, 그것은 연장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힘을 자각하는 데서 가능하다. 

 

그것은 가족처럼 사적인 영역에서도 실현될 수 있지만, 가족의 규모가 줄어들어가는 상황에서 그 여지는 점점 좁아진다. 보다 넓은 공동의 터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마을공동체 그리고 그보다 더 커다란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기획하고 경험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 기쁨과 보람을 통해 상대방을 삶의 동반자로 맞아들일 수 있다. 

 

5. 베이비부머의 위상 

베이비부머 세대가 어느덧 완전히 기성세대가 되었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산업화 세대와 맞서면서 청년의 기백을 떨쳤는데, 이제 곳곳에서 아재나 꼰대, 더 나아가 퇴물 취급을 받는다. 역사의 진보에 앞장서던 패기가 언제부터인가 권력화 되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도 종종 엿보인다. 인구의 규모도 큰데다가 학연이나 여러 가지 활동 경력을 통해 맺어진 단단한 유대를 통해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한 자화상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변신을 꾀하지 않으면, 후배들에게 짐스러운 존재가 될 뿐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그 윗세대와 달리 전쟁을 겪지 않았고, 보릿고개 같은 절대 빈곤도 그다지 혹독하게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것이 궁핍했던 세상을 유년기와 청년기에 통과했기에, 그런 시절의 애환을 쉽게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고도성장의 혜택을 누리면서 젊은 세대 나름의 문화를 개척한 경험도 있기에, 새로운 트렌드에 가슴을 쉽게 열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경험은 그 윗세대와 아래 세대를 잇는 가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세대 간 연계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잘 된다 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면 가냘픈 안위의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함께 빚어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둘러앉아 숙의할 때 생명을 살리는 변화가 시작된다. 삶을 수단화하고 사람을 도구화하는 패러다임을 넘어서면서, 미래에 잔뜩 드리운 암울한  구름을 조금씩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윗세대가 걸어온 세월을 연민의 시선으로 포용하면서, 아랫세대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 책임 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성찰적인 지성을 꾸준하게 연마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적 배움을 통해 성장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자신의 언어로 그려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래 세대를 보살피면서 동시에 그들로부터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다. 환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삶을 품어 안을 때 그 만남은 놀라운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