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癡呆) 아닌 인지(認知) 저하(低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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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렇게 아픈 데 네 아버지는 어딜 가신 거냐.” 엄마는 차디찬 방에 홀로 누워 불분명한 발음으로 이 말을 되풀이하셨다. 나는 그제서야 엄마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날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울고, 잠을 설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동동거리며 병원과 관련 기관을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암과 치매 보험은 들지 않아도 된다, 국가 지원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든 병이 그러하듯, 가족 중 한 명이 환자가 되면 최소한 두세 명이 직장과 사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지난 4월에 암으로 세상 등진 내 동생 때도 그랬고, 내가 맹장이 터졌을 때도 그랬다. 한 사람은 수시로 병원에 들러 간병인 눈치 보고, 가외 돈과 간식을 찔러드리며 “제가 있는 동안 좀 쉬세요.”라고 해야 한다. 환자 상태를 살피며 필요한 걸 챙겨주고 말동무, 목욕, 마사지 등을 해주다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또 한 사람은 다음 단계 치료를 위해 병원, 은행, 관공서를 헤집고 다니며 서류 떼느라 차 안에서 시간 다 보내야 하며, 또 다른 한 명은 두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틈틈이 인터넷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아, 환자와 가족과 의논해야 한다.

 

 이 모든 걸 혼자 하려니 엄마보다 내가 먼저 기진해 죽을 것 같았고, 아니 차라리 죽어지면 싶어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침도 맞아보았다. 가족 돌봄 경험자가 쓴 책을 찾아 읽었지만, 부모를 서로 돌보겠다고 나서는 우애 넘치는 부잣집 자랑에 울화만 깊어졌다. 결국, 나라가 다 챙겨주지 않는/못하는 불합리한 점들, 그리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만고의 진리/명언이 낳은 가족 간 갈등까지, 글이라도 써야 나의 응어리가 풀리고, 다른 이에게도 실질적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가족 돌봄은 대부분 여성, 특히 싱글 여성이 도맡아 한다는 점도 전의(專意)를 불태운다. 여성 싱글 친구만 10명인데,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를 장기간 돌보다 슬픈 이별/홀가분한 작별을 했거나, 돌봄을 위해 미국으로 지방으로 오가고 있다. 현재 엄마가 다니는 데이케어센터 이용자도 단 한 분을 제외하곤 모두 딸, 특히 장녀가 모시고 있다는 게 울 엄마 전언(傳言)이다.

 

 돌봄 노동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여성, 특히 싱글 여성, 맏딸에게 빚진 바 크니 세금 감면, 재산 상속 특혜, 훈장 수여, 국정 교과서 등재, 국립묘지 안장 등의 감사 예우 가 ‘반다시’ 있어야겠다. 무급 돌봄 노동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난을 넘어서면 넘어섰지 미치지 않을 리 없다. 능력과 시간 부족으로 연구를 못하고 있지만, 여성 학계에서 이에 관한 조사, 통계, 논문을 내줄 것을 청원(請援) 하며, 그때 사례 지원자로 나는 물론 싱글 친구 10여 명도 참여시키리라 약속드린다. 꼭 필요한, 좋은 연구 주제 발설이라 아깝다!

 

발병(發病) 인지(認知)와 수용(受容)

 

 엄마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팔순을 넘기신지 오래고, 둘째를 먼저 보냈으니 엄마도 힘들 거다, 그러나 울 엄마가 어떤 분인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한 분이니 잘 이겨내실 거라 믿었다. 엄마는 억척스럽다 못해 독한 분 아닌가. 그래서 이따금 찾아뵈며 문자나 전화 안부만 드렸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종일 누워있다고만 하셨다. “신이 있다면 자식 데려갈 때 에미도 함께 데려가는 게 맞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둘째 병간호와 마지막 보내는 일로 지친 나는 내가 아프면 아팠지, 엄마는 곧 떨쳐 일어나실 거라 믿었다.

 

 

엄마가 데이케어센터에서 그린 자화상

 

 2019년 9월부터 부쩍 기억이 오락가락하셨다. 손자 이름과 조카들 이름을 헷갈려 했고, 날짜 숫자 개념이 무뎌졌고, 어딜 가자고 약속한 요일을 잊고 계셨다. 큰 이모 집에 갔다가 길을 잃었단 전화를 받고 모시러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큰 이모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시자, “죽기 전에 언니를 봐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충격받으실까 봐 말리다 지쳐서 모시고 갔는데, 그 게 결정적으로 엄마 마음과 뇌에 두 번째 구멍을 낸 것 같다. 그럼에도 그토록 흔하게 자주 들었던 치매라는 병과 엄마를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는걸, ‘이제사’ 깨닫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내 무의식 속에 외면 심리가 꽈리를 틀고 있었던 거다. 치매가 무섭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나. 나이 들면서, 50+ 센터 등에 다니면서, 친구들 만나도 건강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치매는 벽에 똥칠하다 죽는 가장 끔찍한 병이란 이야기를 귀 따갑게 듣다 보니, 오히려 무심/무감각해진 면도 없지 않았다 싶다. 치매 시어머니 모시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소심한 완벽주의자인 둘째가 암에 걸렸음에도, 설마 치매가 나의 어머니까지 덮치랴 했던 거다. 아버지와 둘째를 보낸 슬픔 외엔, 평생 나 하고픈 대로 하며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 신선(神仙)이라 불렸기에, 내가 엄마 수발을 들게 되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영국 간호원이 병상에서 호소하는 영상을 보았다. “나만은 예외라고, 나는 비켜갈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누구나 걸릴 수 있으니 제발 조심해 주세요.”

 

 2019년 연말연시를 이집트에서 보내기로 하고 여행비까지 다 결제했던 나는 “내가 이렇게 아픈 데 네 아버지는 어딜 가신거냐.”는 엄마 말에, 비로소 엄마를 모시고 안산시 상록구 치매안심센터(https://sangroksoo.nid.or.kr/intro/intro.aspx) 를 찾았다. 장기요양지원 등급, 지원 기관, 가족 갈등, 간병비, 치매 관련 영화 등으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