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정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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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조선왕릉 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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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42기 중 2기는 북한에 있으며, 나머지 40기는 한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40기의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북한소재 조선왕릉은 이성계의 본처인 신의왕후 능 및 2대 정종과 부인 정안왕후 능). 이 조선왕릉 중 같은 이름을 갖는 2기의 왕릉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貞陵)과,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정릉(靖陵)이다. 2기의 왕릉은 모두 원래 있던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천장(遷葬)됐다.

 

신덕왕후 왕릉-성북구「정릉」

중종대왕 왕릉-강남구「정릉」

 

정릉(貞陵)은 원래 지금의 영국 대사관 부근의 貞洞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에 의해 옮겨졌다. 중종은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소재 서삼릉의 정릉(靖陵)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13대 명종의 친모)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중종만 천장 됐다(장경왕후의 단릉은 현재 禧陵). 2기의 정릉 모두가 사연을 간직한 왕릉으로, 단릉(單陵)인 점도 같다.

 

 

정동에 있었던 조선 최초 왕릉인 정릉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가려면, 지하철 6호선을 타고 보문역에서 경전철인 우의신설선 으로 환승한 후, 정릉역 2번 출구로 나와 10〜15분 도보로 걸어가면 된다. 주변에 주택가를 끼고 있어, 산책을 겸해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을 이른 시간부터(6시 개장) 많이 볼 수 있다. 정릉에서 정은 한자로「貞」을 쓴다. 이것은 정릉이 원래 貞洞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시대에 왕릉은 도성 내에 있을 수 없었다. 도성에서 10리 밖이면서 왕이 당일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인 100리 이내에 조성(출처:경국대전)해야 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했기에 멀리 두지 못하고, 자신의 거처인 경복궁에서 가까운 곳에 있게 한 것이다. 더욱이 왕릉 근처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도록 「흥천사」라는 절을 짓고(현재 서울시 의회 부근으로 추정), 흥천사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흥천사」는 왕릉 주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절을 뜻하는 이른바 원찰(願刹)로, 이후 조선 왕릉 근처에는 이러한 원찰들을 두게 된다.

 

정자각 동쪽 계단으로 왼쪽은 혼이 오르는 신계, 오른쪽은 왕이 오르는 어계로 불린다.

능참봉의 거처인 재실과 수령 380년의 느티나무

 

이방원의 방치 후 260여 년 만에 복원된 정릉

조선의 3대 왕 태종(이방원)은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방원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이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른바 왕자의 난이 둘 사이를 돌아올 수 없는 사이로 갈라 놓는다. 결국,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죽은 지 9개월이 지난 후,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겨 버렸다(출처: 조선왕조실록). 종묘에 부묘되어 있던 신덕 왕후의 묘호도 빼 버렸다. 이뿐만 아니라, 정릉의 봉분 주위를 둘러 쌓은 병풍석을 빼내 지금의 청계천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했다. 아울러 정릉의 제례 공간인 정자각과 능 주변 난간석마저 빼내 건축자재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거의 버려지다 싶은 정릉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260년이 지난 현종 때 송시열의 상소로 이루어졌다. 명복을 빌던 원찰도 갖춰졌다. 그 원찰은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있다가 지금은 옛 이름인 흥천사로 바뀌었다.

 

정자각은 위에서 보았을 때 지붕이 정(丁)자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제례 공간으로 사용된다.

과거 이름의 원찰로 복원된 정릉 근처 흥천사

 

후궁으로 강등됐다 황후로 추숭된 신덕왕후

신덕왕후의 정릉은 지금의 정릉의 자리로 옮겨진 후 260년간 거의 방치 상태로 있었다. 후궁으로 강등된 후 왕릉에서 일반 <묘>가 됐고, 관리도 제대로 안 했던 모양이다. 이후 복원되어 제사를 지낼 때, 당시 정릉 주변에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세원지우(洗冤之雨), 즉,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준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출처:현종실록)

 

신덕왕후는 고종 때 황제의 부인 즉, 황후로 추숭된다. 조선 26대 왕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해서 자신이 황제가 됐으며, 역대 왕들을 황제로 추숭했다. 그러나, 모든 왕을 황제로 추숭한 것이 아니고, 8명만 추숭한다. 태조 이성계, 정조, 순조, 헌종, 철종과, 세자로 책봉된 후 죽은 효장세자(영조의 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 효명세자(고종을 왕으로 추대한 신정왕후의 남편) 등 8인이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도 신덕고황후로 추숭된다. 정릉 비각에는 신덕왕후가 황후로 추숭됐음을 말해 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복원되어 왕릉의 면모를 갖춘 정릉의 모습

비문 내용-대한 신덕고황후 정릉

 

아들 내외 곁에서 부모 곁으로 간 중종

조선 11대 왕 중종의 왕릉인 정릉은, 지하철 2호선, 분당선을 타고 선릉역에서 내려 10번 출구 에서 7분 정도 걸어가면 찾을 수 있다. 9호선, 분당선을 타고 선정릉역 3번 출구로 나와 15분정도 걸어가도 된다. 중종은 사후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정릉(靖陵)에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와 함께 있었다. 그의 아들 인종 내외가 잠들어 있는 효릉도 서삼릉에 같이 있다.

 

그러나,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가 자신의 사후, 남편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정릉에 잠들어 있는 중종을 지금의 강남구 정릉으로 천장했다. 그리고, 중종 옆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 하고자 했다. 그런데 주변 땅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무너져 내리는 현상 때문에 능 조성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문정왕후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사후에 정릉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모셔지는데 바로 「태릉」이다.

 

정릉 주변에는 빌딩들이 많다

강남구 정릉도 일찍부터 주민들 휴식 장소가 된다

 

중종이 서삼릉 정릉에서 옮겨진 곳은 그의 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가 잠들어 있는 「선릉」 옆이다. 흔히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중종의 부모 왕릉인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결국, 중종은 서삼릉에서 아들인 인종 내외와 같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인 없이 혼자만 부모 곁으로 오게 됐다. 조선 19대 왕 숙종은 그의 3명의 왕후와 후궁인 장희빈까지 서오릉에 같이 있고, 심지어 그가 생전에 기르던 고양이까지 함께 묻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중종은 3명의 왕후(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가 모두 각각 다른 곳에 있다. 정릉이 봉분 하나만 있는 단릉인 이유다.

 

 

임진왜란 때 도굴되는 수모까지 당하기도

조선 시대 왕릉 부장품에는 금을 비롯한 보물은 없고, 소박한 일상용품 몇 가지만 같이 묻은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왕릉 내 부장품을 노리고, 도굴 당하는 예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왕릉에 무슨 부장품이 있을 것으로 오해한 일인에 의해 선정릉이 도굴되면서 정릉도 수모를 겪었다. 당시 도굴과정에서 시신마저 불태워져 정릉에는 실제 시신이 없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정릉에서 정(靖)은 ‘편안할’ 정인데 중종의 혼은 별로 편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자각에서 바라 보이는 능침부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 전경

 

왕릉의 능침부 개방은 제한적이다

왕릉에서 제일 올라가 보고 싶은 구역은 능침부이다. 그곳에는 봉분과 함께 주변의 석물 등 볼만한 것들이 많다. 아주 오래전에는 초등학교에서 왕릉으로 소풍갈 때, 왕릉 능침부에서 자유롭게 놀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문화재 보호 및 훼손 방지 차원에서 이제는 능침부 관람이 지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정릉은 능침부를 볼 수 있는 관람로 마저 조성되어 있지 않다. 반면 정릉과 함께 있는 선릉의 경우, 능침 옆 관람로가 마련돼 있어 능침부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물론 내부까지 들어갈 수는 없다.

 

성북구 정릉의 능침부

강남구 정릉의 능침부

 

정릉을 가면 선릉까지 같이 돌아볼 수 있어 선릉을 통해 다른 왕릉의 능침부를 대신 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왕릉의 경우 능침부 개방은 정해진 날 제한적으로 진행하는데, 해설사가 반드시 동행한다. 그것도 능침부 제일 위까지 가보는 것은 대부분 금지되어 있다. 능침부가 위로부터 아래로 상계, 중계, 하계로 나누어졌다면 하계에서만 볼 수 있는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