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시장에서 내렸다. 1988년, 고3 때 단짝 정미네 집 근처였다. 장위동은 마을 전체가 언덕이다. 중턱 장위시장은 장위동 입구에서 시작해서 내리막으로 석관동 출구로 나왔다. 

 

피아노를 치는 정미는 시장 출구와 석관우체국 사이 4층짜리 건물에 살았다. 1층은 아빠의 약국이고, 2층은 부모님, 3층은 정미와 오빠의 방이 있었다. 4층은 창고와 옥상이 있었다. 그때는 동네 약국이 병원을 대신해서 진료와 조제를 했다. 정미 아빠는 우리에게 약국을 맡기시고 잠시 쉬러 올라갔는데, 약사가 없는 약국에서 활명수, 박카스, 아스피린을 팔기도 했다.

 

우등생이었던 정미의 오빠는 우리를 한심하게 여겼지만, 나름 내 친구는 월요일 조회 시간에 애국가, 교가를 연주하는 피아노 반주자이다. 무뚝뚝하신 정미의 아빠도 딸 또래가 약국에 오면 정미를 아는 학생에게만 박카스를 챙겨주셨을 정도로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딸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석관시장에서 떡볶이 500원어치를 먹고 버스를 탔다. 활짝 열린 푸른 하늘에서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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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가을을 재촉하는 날, 장위시장을 다시 왔다. 장위뉴타운 재개발은 2005년부터 성북구 장위동 일대 186만 7,000㎡의 땅을 15개 구역으로 나눠 아파트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서울 동북권 최대규모답게 동네가 모두 공사장이다.

 

장위시장 입구와 장위2동은 지금 없어져 버린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다. 시장 입구는 재개발로 폭격을 맞은 것처럼 푹 패여 있다. 산 하나가 공사 중이다. 이 공사가 끝나면 평평한 도로와 대규모 아파트 자리가 들어서 있을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지금을 담고 싶은 마음에 남아 있는 골목을 걸었다.

 

장위 전통시장으로 바뀐 가게들이 끝자락이 남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반찬을 사며 시장 사장님에게 물으니, 저 위쪽은 재개발이 되었다며 흐려지는 말끝에 그간 사연이 짐작될 뿐이다. 정미네 약국을 찾아본다. 같은 길을 맴돌다가 늙어 버린 사각 타일이 붙여진 4층 건물이 보인다. 나이 들어 버린 정미네 4층 건물을 알아봤다. 지금은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떡집으로 바뀐 1층 약국을 찾았다.

 

이제는 도로 위는 사람이 건너는 작은 육교는 없다. 북부간선도로가 건설되어 이 일대는 한낮에도 묵직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다. 떡볶이를 먹던 석관시장도 부서지고 없다.

 

얼마 전 지인 집들이를 가기 위해서 내비게이션에 아파트 주소를 입력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주차하고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지나 현관과 거실로 향했다. 이제 아파트 주변을 살핀다. 거실에서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단지와 익숙한 조경과 빈 놀이터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좋은 아파트명과 동과 호수가 기억에 없다. 

 

사람들의 체취가 그립다. 골목 초입 무뚝뚝한 약사님, 피아노 치는 딸, 딸과 친구… 아파트 단지에는 아이가 없었고, 꽃집의 아들은 모두 꼭꼭 숨었다.

 

장위동 언덕에서 석관동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마당이 있고, 나무를 가꾸는 골목이 있었다. 우리는 땅을 밟고, 사람을 품고 있던 마을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50+시민기자단 우은주 기자 (wej257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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