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홍윤오 (전 국회홍보기획관‧언론인)

 

 

중년의 끝자락 노년의 시작, 그들이 바로 쉰세대들이다. 그런데 참 애매한 나이, 어정쩡한 세대이다. 일도 더 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삶도 살아야 하고, 사회참여와 봉사를 통해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해야 한다.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해법이 바로 50+세대 정책의 핵심이다. 쉰세대의 사회참여를 위해서는 쉰세대 스스로 허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돈이 전부라는 물욕에 사로잡혀 사는 한 나이 들어서도 봉사나 희생은 기대하기 힘들다.

 

 

신세대(新世代)가 처음 등장했었다.

28~29년 전쯤이니까 거의 한 세대 전의 일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그해부터 모 일간지가 1년여에 걸친 심층 기획 시리즈를 했다. 타이틀은 ‘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였다. 구세대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부류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된 이상 정확한 진단과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시의적절한 기획이라는 세평을 받았고 반향도 그만큼 컸다.

구세대는 누구인가. 왕조국가에서 식민지로, 외세에 힘입어 독립국가 수립 후 다시 동족상잔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부모‧조부모 세대들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빠듯한 살림에 자식들은 많이도 낳았다. 세계적인 베이비붐 시대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어느덧 성장해 사회변혁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어버이 세대와는 다른 것을 보고 듣고 자란 그들이었다. 단순한 세대 차를 넘어 서로 이해하기 힘든 요소들이 많았다. 신세대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연유이다.

그 신세대가 이제 50~60대가 됐다. 이른바 50+세대가 그들이다. 쉰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50이 쉰이기도 하고, 신체적 싱싱함은 상실했으니 쉰세대라는 말이다.

중년의 끝자락 노년의 시작, 그들이 바로 쉰세대들이다. 그런데 쉰 세대는 참 애매한 나이, 어정쩡한 세대이다. 오죽하면 ‘낀 세대’라고도 하지 않나.

냉전 독재, 고속 압축 성장 시대에 유신 교육을 받으며 콩나물시루 학교에 다녔다. 앳된 차장 누나 언니가 배치기로 학생들을 밀어 넣는 초만원버스를 탔다. 교련과 입시지옥에 시달렸고 학생 데모와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이끌어온 주역들이다. 옛날 같으면 글자 그대로 ‘진인사(盡人事)’했다. 그러면 이제 쉬면서 ‘대천명(待天命)’해야 하나? 그럴 수 없는 형편인 것이 문제다. 아직 노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젊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둘 은퇴는 하는데 노후대비는 딱히 해놓은 게 없다. 그렇다고 일을 하려니 자리가 잘 없다. 젊은이들조차 일자리가 없는 판인데 무슨 말을 하랴. 더욱이 지금 우리는 피로사회, 과로사회, 성과위주사회를 살고 있지 않은가.

신세대 등장 이후 한 세대가 지났다. 이제는 쉰세대에 대한 관심과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쉰세대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쉬었다고는 하나 사실은 농익은 절정기를 맞은 세대가 그들이다. 일도 더 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삶도 살아야하고, 되돌아보고 쉬기도 해야 하고, 사회참여와 봉사를 통해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해야 한다.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해법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50+세대 정책의 핵심이다.

 

 

무슨 일을 어떻게 더 해야 할까

 

50+세대의 자아실현과 사회참여를 말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이다. 인생 2모작, 3모작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럼 무슨 일을 어떻게 더 해야 할까. 평균 수명은 길어졌다. 100세 인생이라고 하지 않나. 늙음의 기준 연령도 훨씬 더 높아졌다. 뒷방 늙은이로 내다 앉기에는 몸도 마음도 팔팔하다. 의학의 발달로 쉽게 죽을 수도 없다. 쉰세대는 호모사피엔스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젊고 늙음의 생물학적 연령 기준은 변했는데 사회적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 쉰을 넘으면 벌써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65세 정도가 되기까지의 기간이 어중간하다. 보험금도 65세가 돼야 수령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들에 빗댄 말)도 65세부터이다. 이 연령도 70세 정도로 늦춰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일자리가 없기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쉰세대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대강의 그림은 그려진다. 젊은 세대와 일자리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도 쉰세대의 숙련된 노하우와 경험을 펼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쉰세대 스스로도 그런 일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는 ‘직업(職業)의 시대’가 아니라 ‘업직(業職)의 시대’라고도 한다. 어떤 직책, 자리에 따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과 전문성을 갖추는 업(業)이 먼저라는 얘기다. 과거에는 한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미래에는 직장이라는 공간 없이도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이미 빠르게 오고 있다. 쉰세대는 앉아서 신세타령만 해서는 안 된다. 흘러간 옛 노래만 부를 때가 아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고 다듬어서 자기만의 전문적 업(業)을 찾아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찾아서 즐기기

 

쉰세대의 또 다른 운명적 과제는 자기 자신만의 삶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새 일을 구하는 것보다 사실은 더 중요하다. 개인의 행복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쉰세대는 대부분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이다. 학업과 취직, 가족 돌보는데 모든 청춘을 쏟아부었다. 틈틈이 취미와 여가를 즐겼다고는 하나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시간은 별로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쉰세대는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해야 한다. 더 늙으면 모든 것이 쉽지 않다. 운동도 여행도 예술도 심지어 독서마저도….

몇 해 전 호스피스 간호사 출신의 호주 여성 브로니 웨어(Bronnie Ware)가 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란 책이 화제가 됐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들이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들을 5가지로 요약한 내용이다.

 

1)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대신 내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았다.

2)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했다.

3) 내 감정을 주위에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았다.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겁이 나서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고, 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작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 ‘궁궐 같은 집에서 한번 살아봤더라면’, ‘고급 차 한번 못 타봤네’, ‘애들을 더 엄하게 키웠어야했어’라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라고.

이 글을 보면 통상 은퇴가 시작되는 50대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얼개가 그려진다. 물론 각자의 삶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굳이 타인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쉰세대들은 안다. 쉰 정도 삶을 살았으면 각자가 체득하고 공감하는 인생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나’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이가 들수록 말이다. 각자가 그냥 ‘나’일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사회 관계망 속에서 서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긴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그리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유독 못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남 신경 쓰지 말고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과감히 하라는 얘기다.

두 번째는 실패에 관한 것이다. 실패는 누구나 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성공도 그 시대, 그 순간의 일이지 결과나 훗날의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실패를 밥 먹듯 하더라도 희망의 끈은 결코 놓지 말아야 한다. 절망과 추락이 아무리 끝없이 이어져도 늘 한 줄기 생명의 빛은 만나게 마련이다. 세 번째로,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혼자였다. 마지막 가는 길도 결국은 혼자이다. 쉰세대에서 노인으로 갈수록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새 친구도 만날 수 있고 오랜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맹자는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통즉겸선천하(通則兼善天下)’라고 했다. 즉, 곤궁할 때는 자기 수양에 몰두하고, 운이 통할 때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펼치라는 뜻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키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은 무조건 많이 걸을 것을 추천한다. 산으로 들로 다닐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 자체가 축복이고 감사할 일이다. 걷다 보면 신체 건강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온갖 시름 걱정도 다 날려버릴 수 있다. “걸어야 살 수 있다”라는 한 마디는 가장 간단 명료한 진리이다. 다섯째는 가능한 자주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삶의 지혜를 전수해 주겠다며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도 교만으로 흐를 수 있다. 쉰세대는 말을 아끼고 많이 들어줘야 한다. 경제적 능력이 되면 지갑이나 통 크게 열어주면 될 일이다. 자기성찰의 대목에 이르니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언급된 ‘오상아(吳喪我)’란 말이 떠오른다. ‘나를 잃어버린다’, ‘나를 장사 지낸다’, 이런 뜻이다. 거짓된 자신을 버리고 진정한 자아로 거듭 태어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새 세상, 새 인생을 살아야하는 쉰세대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50+의 사회참여‧봉사

 

쉰세대가 사회를 등한시한 채 각자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이다. 은퇴자의 사회참여나 봉사 같은 활동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앞뒤가 조화롭게 맞아 떨어진다. 쉰세대는 젊은이도, 노인도 아니지만 그들의 심정을 잘 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도 있고 신체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다. 이런 경우는 쉰세대의 사회참여에 장애물이 없다. 이들이 사회참여를 할 수 있도록 거버넌스를 잘 구축하면 된다. 국가이건 지자체이건 혹은 사회봉사단체, 모임, 결사체이건 간에 이들이 일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주면 된다.

문제는 여전히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신체적으로 더 일찍 쇠퇴한 쉰세대들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아직도 이룩해놓은 게 없다. 30여 년 전 사회생활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건 어떻게 해보겠지만 일정한 벌이도 없이 남은 수 십 년을 살기에는 막막한 세대들. 그들이 바로 외롭고 딱한 쉰세대들이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의 경우 우리와는 처한 환경이 좀 다르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별도의 부처를 만들기도 하는 등 은퇴자들을 위한 지원 체계를 나름대로 갖추고 있다. 우리가 벤치마킹할 수 있는 내용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와는 제반 여건이나 입장이 좀 다르다. 그들은 선진 복지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참여활동도 봉사형‧보람형이 많다. 노장청(老壯靑)의 조화, 희생, 봉사가 가능한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 50+들은 아직도 생계형이 많다. 당장 민생고부터 해결이 안 될 판인데 무슨 봉사며 희생을 하겠는가. 정책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전반적으로 선진화되고 먹고 살만해야 50+정책도 함께 갈수 있는 것이다. 결국 쉰세대의 사회참여 문제는 줄탁동기(啐啄同機‧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처럼 두 가지가 서로 맞아 떨어져야 한다. 본인이 사회를 위해 베풀고 봉사하겠다는 준비가 돼 있어야하고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국가‧정부‧사회단체의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아직도 기자를 천직으로 여기는 한 쉰세대 선배는 자신의 카톡 자기 상태 표시에 이런 문구를 적어놓고 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면 남을 도우라’고. 나이 들어서도 끝까지 아등바등 살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베푸는 삶의 자세를 가지라는 역발상적 당부이다.

쉰세대의 사회참여를 위해서는 쉰세대 스스로 허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돈이 전부라는 물욕에 사로잡혀 사는 한 나이 들어서도 봉사나 희생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쉰세대는 불나방이 불빛만 쫓듯 부귀영화만 추구할 것이다. 젊은이들과 경쟁도 해야 한다. 쉰세대 스스로 피로사회, 과로사회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지 않는 한 그들에게 인생 2막의 멋진 미래는 난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