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두려운 사람과 두 번째 서른이 즐거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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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이 되는 것이 두렵다는 분의 글을 읽었다. 서른여덟이거나 서른아홉쯤 되었을 것이다. 새삼 마흔이 대체 언제였나 싶다. 나도 그랬을까? 스물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것보다 마흔으로 넘어갈 때 두려웠을까? 마흔이라고 적어본다. 다시 서른이라고 써 본다. 확실히 서른과 마흔 사이에는 훅 치고 들어오는 뭔가가 있다. 스물과 서른보다 무겁고 슬프다. 왜 그럴까? 서른까지는 ‘그래도 아직은 청춘’ 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걸까? 솜처럼 가볍게 날던 서른의 무게가 마흔이 되면서 돌덩이로 변하기라도 했을까? 어쩌면 삼십 년의 무게가 한꺼번에 내려앉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다.

 

 서른아홉의 나도 초조했었다. 마흔이 되면 이대로 내 삶이 결정된 채 늙어갈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했던 기억이 있다. 서른을 떼고 나면 하나 남은 의자에 먼저 앉겠다고 가방을 던지는 그런 마흔이 될까 봐 불안해했다. 아이들이 부르는 엄마라는 이름이, 그 이름 앞에 아이들 이름만 번갈아 달리는 누구 엄마로 영영 불리게 될까 봐 다가오는 마흔이 반갑지 않았다. 그랬구나. 마흔이 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그 마음이었구나. 되짚어가보니 알겠다. 그렇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가끔 마흔이 기대될 때도 있었다.

 

 

 “아줌마가 다 그렇지 뭐.”

 

 살찐 몸을 가리려고 커다란 셔츠를 사시사철 입으면서도 늘 허허 여유롭던 401호 언니. 마흔한 살 그 언니를 보면서 마흔은 참 편한 나이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때때로 어떤 일들은 그 나이가 돼 봐야 안다는 말이 생각난다. 지나 보니 마흔은 여전히 청춘이더라는 것들이 대개 그렇다. 비단 마흔뿐 아니라 서른 즈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소소한 그런 것들..

 

 마음도 둔해졌는지 쉰 중턱을 넘은 후로는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예순이 되기를 두려워하기보다 세 번째 스물, 혹은 두 번째 서른이라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여유도 생겼다. 아이들이 자라고 누구 엄마로 불리던 시간이 참 행복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내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보다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낸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우연히 본 거울 속의 중년 아줌마를 보고는 귀밑머리 희끗희끗 올라오는 그녀를 한동안 노려본 적도 있었다.

 

 

 '너도 늙는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까?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지?'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랬구나.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어.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아.. 다행이다.

 

 대부분의 중년처럼 오십 중반까지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았다.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러지 않았을까? 다른 것이 있다면 성별의 차이, 미혼과 기혼의 차이 정도겠지. 지금은 나를 위한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 가끔 한 번씩 잘하고 있는 걸까 걱정은 된다. 아이들이 컸다 한들 손 가는 일이 왜 없을까.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보며 내가 즐겁게 활동하는 것이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두 번째 서른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나이다. 가족을 위해 사느라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시도하기에 알맞은 나이다. 그 나이에 무엇을 얼마나 이루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열정만큼은 청춘 못지않은 나이다. 서울시50플러스 캠퍼스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생 전반전을 잘 채우고 인생 후반기를 새로 물들이기 위해 다시 시작을 외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나의 새로운 삶도 서울시50플러스 캠퍼스에서 시작되었다. 우연히 후배의 페이스북 글을 읽고 찾았던 서부캠퍼스에서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운 좋게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수 있었다. 벌써 4 년째 캠퍼스를 드나드는 중이다. 누구 엄마로 불리던 내가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4기를 수료하면서 받은 명함케이스를 채우겠다는 바람도 이루었다. 지금은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명함을 넘치게 갖고 있다.

 

 처음 서른과 두 번째 서른은 분명 다르다. 첫 번째 서른이 풋사과라면 두 번째 서른은 추위를 견디느라 알알이 꿀 박힌 사과일 것이다. 한 걸음 내디딜 용기만 있다면 마음에 품었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선물 같은 나이.

 

 

 당신도 불안한 마흔을 지나 두 번째 서른을 앞두고 있는지? 당신에게 다가오는 두 번째 서른은 어떤 의미인지? 기억하자. 잊었던 꿈이 깨어나는 순간 두 번째 다가오는 서른은 그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글/사진:50+시민기자단 정용자]